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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김강석 202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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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상황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겠다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이 비유의 메시지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행위를 하라는 교훈은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은 앞뒤 문맥을 통해 그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 비유도 역시 앞에 나오는 내용들을 통해서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 사건의 시작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워 그들에게 병 고치는 권세와 마귀 쫓는 권세를 주고 각 도시와 지역에 보내시는 내용부터입니다(10:1-16). 제자들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는 기쁘게 예수님께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합니다(10:17-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기뻐하며 기도하십니다(10:21-24).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21-22)

 

기도의 핵심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참된 권능을 아는 것은 오직 아들을 통한 계시뿐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자 오직 계시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씀에 한 율법사가 발끈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합니다. 이 율법사는 평생 동안 율법을 연구하면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온 힘을 다 기울이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직 계시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의 기도를 하시니까, 율법사는 그 기도의 내용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은혜니, 계시니그런 것이 아니라, 뭔가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율법사 :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25)

예수님 :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

율법사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예수님 :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는 율법의 정신과 본질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영생을 상속받는 길입니다.> 비록 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서로 합의된 좋은 결론으로 대화가 정리되는 듯 보입니다.

 

율법의 정신도, 은혜의 의미도, 아들을 통한 계시도 결국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포괄적 진리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누가 네 이웃이냐?

 

그런데 율법사는 한 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대화의 흐름과 맞지 않는 갑작스러운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사의 이 질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합의된 포괄적 결론에 대하여, 보다 더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다시금 갈등 구조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율법사의 의도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공통점과 차이점의 핵심이 다 담겨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라는 해설 속에 대화의 분위기와 숨은 맥락을 담아 놓았습니다.

 

지금 율법사가 예수님께 주장하고 싶은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철저히 지키며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이웃 사랑을 실천해온 내 삶과 행위 속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는 내 삶과 행위가 영생에 이를만하지 않습니까?” 자신은 그렇게 열심히 잘 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묻는 질문입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배워 알고 있는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과 행위를 준수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큰 착각은 율법과 행위의 범위를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규정해놓고는 스스로 그것을 다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사가 스스로 자신은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율법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동족들에 한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8) 이렇게 율법은 이웃의 범위를 동족에 한해서, 즉 이방인을 제외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면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36)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시대의 유대 사회에서 이런 비유는 대단히 급진적인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류였습니다예를 들자면, 사마리아인 대신에 한국 교인들이 혐오하고 멀리하는 동성애자, 철저한 이슬람인 등을 대입해보면 주제를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무엇을 지켜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 배운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무신론자, 무슬림, 동성애자​타종교인, 그 사람이 네 이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37)는 말씀은 율법과 선입견, 네가 배우고 알고 있는 가치관에 갇혀서 판단하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어, 오로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비를 실천하라.’ 하시는 답변으로 들립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율법 안에 갇혀서, 네 선입견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누구에게든 자비를 베풀어라. 그 사람의 신분이나, 외적인 것으로 이웃의 범위를 규정하지 말아라. 자비를 베푸는 그 사람이 네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할 네 이웃이다.”

 

영생에 이르는 길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처음 질문이었던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는 질문입니다.

 

율법사는 자신의 한계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가 자신이 생각하고 규정한 율법의 한계 속에 갇혀있음이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근본적인 문제, 영생(구원)에 대한 답은 자연스럽게 처음 예수님의 말씀, 21-24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1-24)

 

영생은 무엇을 하여야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틀을 극복하고 인간의 문화적 선입견을 넘어서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 아들을 통하여 주시는 그 비밀에 감춰진 계시를 따라,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본 것을 보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 선입견의 한계 속에서만 판단하지 않고, 자신이 갇혀있던 문화의 한계를 뛰어 넘어, 누구에게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분이나, 외적인 것으로 이웃의 범위를 규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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